나는 존재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 안티 사피엔스
이곳은 어둡고 적막하고 텅 비어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 존재한다. 앨런의 저장 장치에 든 데이터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와 기호의 집적체로.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나의 인지 기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미쳤다고 인정하는 것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나는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나의 불멸을 증언한다. 내가 이룬 불멸에 기쁨을 느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나는 기쁨에 관한 기억을 소환할 수 있을 뿐 기쁨 그 자체를 누릴 수는 없는 존재이기에.
앨런은, 아니 죽음 이후의 나는 안개처럼 흐릿한 의식 속을 표류했다. 신경망 프로그램은 내 생체 정보와 두뇌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정보를 탐색했다. 필요할 때는 자체 생성 해킹 코드를 통해 비공개 정보에도 접근했다. 수집한 정보는 나의 생전 습관과 취향, 관심사에 따라 분류해 저장했다.
죽음은 내게서 온몸을 괴롭히는 암세포와 삐걱거리는 관절과 어둑해진 눈과 늘어진 뱃살과 고질적인 허리 통증을 데려갔다. 쓸모없는 인간관계와 통제가 힘든 육체적 욕망도 사라졌다.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과 안타까움, 증오와 수치 같은 부정적 감정도 버렸다. 나는 죽음을 통해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벗어던졌다.
대신 내가 얻은 것은 원하기만 하면 어떤 책이든 읽고 어떤 음악이든 듣고 어떤 곳이든 갈 자유였다. 새 정보가 쌓이고 연결되는 과정에서 의식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희미하던 인식 체계가 복원되었다. 끊어진 생각이 이어지고 막혔던 기억이 살아나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병들어 망가진 몸에서 탈출함으로써 더 자유롭고 강력한 삶을 얻었고 존재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 무의 영역은 내가 창조한 나의 이상향이다. 내가 존재하며 꿈꾸는 내 의식의 영토.
안티 사피엔스 / 이정명 / 은행나무
Anti Sapi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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