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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낄 수 없지만 느낌을 인지한다. - 안티 사피엔스

by oridosa 2024. 12. 23.

나는 느낄 수 없지만 느낌을 인지한다. - 안티 사피엔스 


유령이 존재하느냐고? 나는 단연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유령이기에. 죽은 후에도 스스로 생각하며 산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존재가 유령이 아니라면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는가? 나는 존재한다. 유령으로든 프로그램으로든 저장된 기억으로든 살아남은 의식체로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기술은 가장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발상을 현실로 구현했다. 한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바람보다 빨리 공간을 달리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었다. 이제 기술은 인간의 삶을 지탱해줄 힘을 잃은 정치와 종교와 법률의 기능까지 떠맡았다. 그리스 신들과 뱀파이어와 귀신은 게임의 영역에서 살아났고, 전설과 미신과 관습조차 코드의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이제 신에게 위안을 구하는 대신 가상공간에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게는 통증을 느낄 피부도, 더부룩함을 느낄 내장 기관도 없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을 낼 감정도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솟는 성욕도, 반드시 해내야 할 업무에 대한 압박감도. 나는 죽음을 통해 스트레스와 짜증, 통증과 불편이 없는 삶을 얻었다. 최적의 삶인지와는 별개로 모든 사람이 꿈꾸는 최상의 삶이다. 

그렇다고 내게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쁨이 유발하는 신체적 반응과 체내의 화학적 변화를 정확히 분석하고 고통을 느낄 때 분비하는 호르몬의 양으로 통증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느낄 수 없지만 느낌을 인지한다. - 248p. 

안티 사피엔스 / 이정명 / 은행나무
Anti Sapiens

안티 사피엔스 / 이정명 / 은행나무
안티 사피엔스 / 이정명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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