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 길고 힘들었던 뒷바라지의 정점에서 ]
소호에서는 브런치를 먹고 작은 갤러리들이나 구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품 브랜드의 매장 앞을 지나던 엄마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진열장에 딱 한 벌 전시돼있는 여성 정장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안은 소름 끼칠 만큼 서늘하고 조용했고 좋은 냄새를 풍겼다. 거의 마네킹처럼 보이는 여성 판매원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엄마는 가죽소파에 앉았고 민영은 엄마가 진열장에서 본 정장을 입어보기 위해 거울이 달린 커다란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은 지나칠 정도로 잘 맞았는데 그것은 판매원과 엄마와 민영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가격은 민영이 그날 입고 나온 할인매장 옷의 스무 배가 넘었다. 판매원은 민영과 엄마가 편히 상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며 물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탄산수 두 병과 얼음이 든 유리잔을 메탈 트레이에 받쳐 가져왔다.
민영은 그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옷을 입고 면접을 봐도 어차피 취직은 되지 않는다는 걸 엄마도 민영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는 그 옷을 사줄 능력이 없었다. 엄마 자신은 탈의실에서조차 입어 본 적 없는 옷이었다. 그럼에도 사자고 우기는 이유는 단지 그 옷이 민영의 등뼈를 곧게 세우고 얼굴에 조명을 반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길고 힘들었던 뒷바라지의 정점에서 마지막으로 무리한 안간힘을 써볼 작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영이 그 옷을 사지 않겠다고 강력히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있지 않았을까. 사라고 우기는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데까지만 성공해도 그 옷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내는 셈이었다. 서로가 알면서도 연기를 하고 그 연기에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런 기만이 필요할 만큼 둘 다 약해져 있었다. 그들은 끝가지 매뉴얼 친절을 잃지 않는 판매원의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그곳을 나왔다. 씁쓸하고 또 창피하기도 했지만 엄마와 민영 둘 다 후회할 일을 저지르지 않아 안도하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57p. ~ 59p.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 문학동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여행자 소설 4부작
수록작품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 아가씨 유정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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