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물리학 - 지역감정은 정치인이 만든다 ]
한국의 동서 지역갈등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일부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동서 갈등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경합한 1963년 대선에서는 박 후보의 득표율이 남북 방향으로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우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후 똑같은 두 후보가 경쟁한 1967년 선거 때는 박 후보가 경상도에서 약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역시 매우 두드러진 것은 아니다.
동서 지역 간 투표성향 차이는 이후 점점 커지다 한국 대선 역사에서 가장 극명한 지역감정을 보여준 97년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선거에서 극에 달한다. 한국을 동서로 양분하는 지역감정은, 길게 잡아 30년도 안 되는 한국 현대사의 암울한 기간에 만들어지고 고착화됐다.
지역감정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투표에 의해 선출되기를 바란 정치인을 위해 조장된 것이다. 대동소이한 사람을 임의의 기준에 따라 두 집단으로 나눈 뒤 집단내부 결속을 강화하면서 다른 집단과의 소통을 단절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우월하다는 믿음과 상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여럿 있다. 국민 통합을 방해하는 자들은 평범한 우리가 아니다.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차이를 과장해 우리를 또 다른 우리와 구별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이용해 손쉽게 선거에서 선출되기를 바랐던(그리고 여전히 바라는) ‘그들’이었다.
사람들의 성향을 임의의 잣대를 이용해 둘로 나누고, 그 구별을 이용해 당선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이런 ‘구별’에 바탕을 둔 선거에서 득을 보는 것은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정치인뿐이다. 머리 복잡하게 공약을 개발할 생각 없이, 단지 ‘우리가 남이가’만 되풀이하는 그런 정치인은 결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그 변화는 그들이 아닌 평범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 38p. ‘누가 지역감정을 만드는가.’
세상물정의 물리학 / 김범준 /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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