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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 생활인 하루키의 모습

by oridosa 2019. 10. 11.

[장수 고양이의 비밀 ] 생활인 하루키의 모습


[장수 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장수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장수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의 소설은 소설대로,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독자에게 만족을 준다. 이 책은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글 60여 편을 모은 것이다. 25여 년 전의 글인데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촌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당시 일본의 모습, 일본 출판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소확행’의 원조인 저자답게, 생활의 작은 부분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다. 편안히 읽을 수 있다.

글을 쓸 당시는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의 성공 이후로,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선 시기다. 출판사의 글 섭외도 많고,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던 시기다. 인기 작가로서의 일상, 외국 생활의 에피소드, 출판업계와 관계자들의 에피소드 등을 엿볼 수 있다. 하루키와 오랜 기간 같이 일해온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도 좋다. 정밀화는 아니고 장난하듯 그린 그림이지만 정감 있다.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장수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장수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글을 쓰면서 번역도 같이 한다. 자신의 글을 쓰는 것과 남의 글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번갈아 하면서 글의 균형을 잡는다. 그는 자신의 글이든, 남의 글이든 그의 손을 거쳐 가는 것에 많은 의미를 둔다. 번역의 묘미, 번역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글에 덧붙였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초고를 남에게 맡기면 번역이라는 작업의 제일 맛있는 부분을 놓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번역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뭐니뭐니해도 가로쓰기로 쓰인 문장을 처음 세로쓰기로 일으켜 세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머릿속의 언어 시스템이 쭉쭉 스트레칭하는 감각이 더할 나위없이 상쾌하다. 번역 문장의 싱싱한 리듬은 이 첫 번째 스트레칭에서 태어난다. 이 쾌감은 아마 실제로 맛본 사람밖에 모를 것이다. - 64p.


     번역이란 몹시 시간이 걸리고 ‘굼뜬’ 작업이지만 그만큼 세부까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큰 이점이다. 내 생각에, 번역 작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들 중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없지 싶다. 더러 좀 눈치 없는 구석이 있을지라도 결코 극악무도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다. - 65p.

글 쓰는 사람들은 간단한 글을 좋은 글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집어넣은 글보다, 간소하면서도 어렵지 않고 편안한 글을 추구한다. 하루키의 글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겉치장이 요란한 글보다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 더 좋듯 덕지덕지 붙여놓은 글은 본 의도와는 다른 뜻을 전하기도 한다. 일도 그렇다.


     '미리 만들어 놓은 색깔'이란 대개 엉뚱한 결과물을 낳기 마련이다. 새하얀 방파제에 굳이 갈매기를 그려넣는 발상과 마찬가지다. 그냥 평범하게, 깔끔하고 심플하게 두면 될 것을, 누가 뭐라건 본연의 맛이란 오랜 시간 천천히, 속에서 절로 배어나는 것이니까. - 17p.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의 작가는 노년의 작가와는 생활과 생각 모든 면에서 다를 것이다. 작가는 20여 년 후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무엇인가를 후세에 남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작가에게는 작품이 그럴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읽고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팬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형체 있는 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법. 기억하는 것이 남는 것이다.

     형체 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형체 없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 201p.

하루키는 글과 생활에서 여러모로 균형을 강조한다. 글쓰기와 번역, 달리기와 음악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자신의 생활에 균형을 잡아주는 요소들이다. 균형 있는 생활은 좋은 글쓰기로 이어진다. 그의 인생이 늘 그렇다.

     인생이란 예상치 못한 덫이 가득한 장치다. 그런 현상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총체적인 균형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인생에 좋은 일이 하나 생기면 다음엔 반드시 좋지 않은 일 하나가 기다린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일 관련으로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대신 인간관계 하나가 박살나는 식이다. 사랑이 하나 태어나면 미움도 하나 태어난다. - 190p.

끝으로, 하루키의 팬이라면 다 아는 얘기. 그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때의 이야기를 ‘다시’ 적는다.

     내가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어느 하루'가 있다. 스물 아홉 살 4월의 오후였다. 나는 그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햇빛과 바람의 강약,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 내 머릿속에서 문득 무언가가 작게 반짝였고, 그래서 '그래, 지금부터 소설을 써야지'하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했다. 구체적인 계기나 근거 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혼자서 인식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약 일 년 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라는 소설이 문예지 신인상을 타고 불완전하게나마 작가라 불리는 몸이 되었는데, 스스로가 느끼기에는 바로 그날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이미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 2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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