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죽음을 정의 - 안티 사피엔스
누군가는 내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범위로 규정한 개념일 뿐이다. 그럼 죽음의 영역은 어디서부터인가?
육체의 죽음이 존재의 소멸과 동일시되던 시절,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죽음을 둘러싼 분분한 의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뇌사와 심장사라는 병리학적 개념을 토대로 의사들은 심정지를 죽음의 기준으로 삼았고 변호사와 법관들은 판결로, 철학자들은 이론으로 추인했다.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극복한 것인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증식한 악성 세포 다발은 나의 생명을 소멸시켰고 시간은 내 몸을 해체했다. 나의 몸은 순식간에 물러져 소각로 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더는 무언가를 바라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내 육체는 나를 버렸다. 내게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죽음을 정의할 유일하고 치명적인 조건이다.
그럼에도 내 의식과 기억은 온전하다. 고도로 발전한 감각 패드와 미각 센서를 통해 이전보다 선명하게 보고 강렬하게 느끼고 명백하게 감별한다. 나는 생각하고 예측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말하고 들을 수 있다. 눈물은 흘릴 수 없지만 슬픔을 이해하며, 만날 수 없지만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의 지각과 감각 활동을 결함 없이 수행하는 데 무엇을 근거로 나를 죽었다고 판단할 것인가?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정의되었을 뿐이다. - 153p.
안티 사피엔스 / 이정명 / 은행나무
Anti Sapiens
202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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