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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1월호 – 볼 수 없는 것

by oridosa 2021. 1. 11.

[에세이 1월호 - 볼 수 없는 것 ] 


언젠가 90이 넘은 할머니가 커다란 가죽 여행 가방을 갖고 그의 열쇠집에 나타났다. 도무지 가방의 자물쇠를 열 수 없노라며. 요즘이라면 캐리어라고 할 성격의 가방이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출장 가방이었다며 할머니는 그 무거운 가방을 낡은 유모차에 싣고 왔다. 가방에 작으나마 쇳덩어리 자물쇠가 달려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고.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았으나 할머니는 뭔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며 열어달라고 재촉했다. 가방의 자물쇠는 어렵지 않게 열렸고 그 안에는 물건이랄 게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별 모양의 씨앗 같은 게 달랑 하나 있던 것 말고는. 그런데 할머니는 그것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오래오래. 그러고 나서 열쇠 아저씨에게 불쑥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어떤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뭘까요, 그 꽃이?”

어느새 애잔해진 할머니가 말했다.

“볼 수 없는 꽃.”

할머니가 했던 말의 뜻을 열쇠집 아저씨가 나에게 요약해주었다. 할머니 부부는 뜰에 모란을 키웠다. 탐스러운 꽃을 기다리며 부부는 영량의 시처럼 삼백예순날을 기다렸다. 모란이 아름다운 것은 금방 피었다 금방 져서 하냥 섭섭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 부부는 미국에 사는 아들 집을 방문했고, 공교롭게도 여행이 모란의 개화 시기와 겹쳐 처음으로 뜰 안의 모란을 보지 못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타국에서 그리던 그때의 모란, 그것이 정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노라며.

“이게 모란이 지고 난 뒤 맺은 씨앗이라오.”

노파는 가방 안의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쇠집 아저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할머니는 가방을 다시 낡은 유모차에 싣고 왔던 길을 걸어 천천히 되돌아갔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는데 아저씨가 나에게 불쑥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게?”

일차방정식처럼 쉬워서 내가 대답했다.

“볼 수 없는 사람이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다시 물었다.

“그 할머니에게는 그게 누구였겠어?”

아, 나는 그게 누구인 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장을 갈 때마다 들고 다녔던 커다란 가죽가방에 모란의 씨앗을 암호처럼 남기고 먼저 간 사람. 더는 볼 수 없는 사람. 나는 그녀가 유모차를 밀고 사라졌다는 길모퉁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 월간에세이 2021년 1월호, 31p. ~33p. 구효서의 글 [볼 수 없는 것] 중

 

 

붉은 모란 꽃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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