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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식탁, 밤잼 - 적막한 산에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만

by oridosa 2022. 11. 20.

[보통날의 식탁, 밤잼 - 적막한 산에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만 ]


외갓집 작은 방, 할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삼십 년이 넘은 오래된 수첩이 있다. 농사 일지인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언제 무엇을 심었는지, 수학량은 어땠는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수첩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다음 해 농사 계획을 세우신다고 했다. 고추가 '고초'라고 적혀 있기도 한, 그렇게 틀린 글자마저도 매력적인 오랜 기록물이 내게는 보물처럼 느껴진다.

밤 농사는 외갓집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가을이 되면 밤을 수확하기 위해 온 가족이 출동했다. 늦여름부터 10월, 밤 농사가 끝날 때까지 휴일이면 아침부터 종일 밤을 주웠다. 엄마와 외삼촌은 평일에도 휴가를 내 할아버지와 함께 밤을 주울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의 모든 가을 추억은 밤 산에 있다. 

할아버지의 밤나무는 과실수로 치면 고목이다. 그래서인지 등이 굽은 것처럼 휘어진 나무도 많고 껍질도 거칠다. 커다란 밑동에는 곰팡이 같은 허연 지의류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였던 수확량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나무들도 나이 든 것이다. 

결국 몇 년 전, 큰외삼촌의 주도로 밤나무를 일부 베어내고 고사리 종근을 심었다. 가족들은 구수 넘은 할아버지가 고되고 위험한 일을 그만하게 됐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밤나무를 베어낸 해 가을, 가족들은 처음으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주말에 어딘가로 놀러도 가고 가만히 앉아 무르익은 가을 풍경을 감상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허리 숙여 가며 밤을 줍지 않아도 되니 몸도 편안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마음은 우리 생각과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밤나무를 베어내고 생긴 시간 여유가 할아버지에게는 허전함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에게 밤나무 산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생활터이자 친구라고 하셨었다. 정말 그랬다. 할아버지는 일이 없어도 산책 삼아 밤 산에 오르셨다. 마음이 답답할 때도 밤 산 중턱에 있는 원두막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드시곤 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할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결혼해 식구가 늘고, 고사리손으로 밤을 줍던 손주들이 장성하는 오랜 시간 동안 밤 산은 할아버지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다. 

본격적인 밤 농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밤을 주우러 밤 산에 오르셨다. 긴 세월 해온 일의 부재를, 뻥 뚫려버린 가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오랜 벗 만나러 가기, 그것이 할아버지가 아는 유일한 가을 보내는 법이었다. 엄마는 홀로 산을 오르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가을의 여유를 반납하고 할아버지와 산을 오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나도 엄마를 따라 할아버지와 밤을 주우러 갔다. 밤 산 여기저기에서 툭- 툭- 밤송이 덜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멈추면 적막이 흘렀다. 간간이 새소리,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날 뿐. 이 산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온 가족이 모여 밤을 주울 때는 산이 다 꽉 찬 느낌이었는데... 할아버지의 허전한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으로 원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할아버지께 넌지시 여쭸다. 할아버지에게 밤 산은 어떤 의미냐고. 돈이 나오는 곳이니 좋다며 껄껄 웃으시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진심을 털어놓으셨다. 몇십 년을 함께 했기에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고. 아쉬운 마음에 밤 산에 올랐지만,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이제는 이 산을 찾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되었다고.

"...밤도 다 됐고, 사람도 다됐고..., 세월이 인자 그만하라 안카나."

당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세월이 이제 그만 밤 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한다. 그 말씀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엄마도 나도 뒤돌아 눈물을 삼켰다. 지게를 지고 걷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렇게 작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그날, 할아버지는 오래된 수첩에 밤 수확량을 기록하셨다. 마치 밤 농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될 것처럼...

보통날의 식탁 / 한솔 / 티라미수

 

보통날의 식탁 / 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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