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그리고 능소화] 2019. 10. 21
영빈은 현금의 집을 알고 있었다. 이층집이었다. 여름이면 2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처음 느껴본 어렴풋한 허무의 예감이었다. 이층집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현란한 능소화 때문에 그 집이 그 동네서 특별나 보인 것이지, 그 안에 누가 사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그 이층집은 확실하게 현금의 집이 되었다. -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중 16p.
박완서의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의 처음 부분에 '능소화'가 등장한다. 골목길에서 바라본 이층집 기둥에 핀 능소화. 이 책을 읽을 때만하더라도 나는 능소화 꽃을 몰랐고,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꽃과 꽃이름을 알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자주 눈에 띄었다. 국도변 낙서 방지 그물에 무리지어 피었던 능소화. 진안 마이산 절벽의 능소화. 동네 산책길 골목 담장에 핀 능소화.
여름 산책길에 능소화를 찍었다. 휴대폰을 보니 그동안 능소화를 많이 찍었다. 해마다, 눈에 띄면 찍었던 것 같다. 주황색의 커다란 꽃송이는 화려함과 수수함을 동시에 지녔다. 길 가다 보게 되면 멈춰서서 오래 지켜보곤 한다.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냐는 질문은 부질없다. 모든 꽃은 다 예쁘고, 다양한 이유로 기억에 남는다. '능소화'는 '아주 오래된 농담'으로 기억된다. 나중에 단독주택 구해서 살게 되면 울타리 담장이나 대문 기둥에 능소화를 심고 싶다.
- [500자 풍경사진 200]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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