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가까운 말 -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 모 라디오 방송을 듣던 중, 진행자가 낭독한 시다. 들으면서 바삐 손으로 받아적었다. 검색해보니 그날 모 신문의 시 읽어주는 코너에 소개된 시였다. 라디오 게시판에도 댓글이 많이 달렸다.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음'이라는 말로 지금을 미루었던가. 그만큼 아쉬움을 만들어 낸 '다음', 그리고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심장에 가까운 말 / 박소란 시집 / 창비시선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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