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의 보답 - 신이 깃든 산 이야기
조부에 얽힌 설화가 있다.
스즈키 저택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는 조부의 본가에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옛날 옛날 그 집에는 성씨를 쓰고 칼 차는 것을 허락받은 마음씨 좋은 주인이 살았다. 주인과 일꾼들이 한자리에서 밥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할 시절이었지만 섣달 그믐날만은 주종의 구분 없이 이로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 그 저택의 관례였다.
올 한 해는 정말 열심히 일해 주었네, 오늘 저녁은 주인이고 안주인이고 머슴이고 하녀고 없으니 즐겁게 놀아보세, 라는 것이다.
풍년이 든 해였는지 산에서 벌채를 하는 해였는지 그날 저녁 연회는 전에 없이 호화로웠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만취하여 쓰러지는 자도 나오고 해서 주인은 “음식과 술을 그냥 놔둬도 좋으니 그만 자게”라고 일러두고 방에 들어가 잤다.
일꾼들은 주인 말대로 모두 난로 옆에서 잠들고 말았는데, 한 머슴이 한밤중에 목이 타서 눈을 떠보니 누군가 빈지문을 열고 슬금슬금 들어오는 것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섣달 그믐날 도둑질을 하려는 괘씸한 자가 있다니, 하며 뛰는 가슴을 누르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 상대는 사람이 아니래 개나 고양이만한 짐승이었다. 마침내 눈이 어둠에 익으니 한 무리의 너구리들이 보였다.
들킨 줄 알면 해코지할까 걱정이 된 머슴은 잠든 척하기로 작정했다.
너구리들은 멈춰 서서 잠시 여기저기를 주뼛주뼛 살펴보다가 곧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중에 제일 늙은 너구리가 인간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집 주인은 과연 덕이 있구나. 우리를 위해 이렇게 진수성찬을 마련해주셨다. 이보게들, 주저하지 말고 맛나게 먹게.”
늙은 너구리가 상좌에 의젓하게 앉아 손짓하니 먼저 마누라로 보이는 암너구리가 옆에 앉고 자식들도 서열대로 얌전히 앉았다. 짐승에게도 상하 신분이 있는지 아까 일꾼들이 먹던 밥상에는 역시 그 정도 지위로 보이는 너구리들이 예의 바르게 앉았다.
그 모습이 하도 기특하여 머슴은 타는 목도 잊고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자, 자, 여러분. 올해도 열심히 일해 주었네. 여기 너그러운 주인장이 한 턱 내셨으니 실컷 드시게.”
열심히 먹고 마시기 시작한 너구리들의 배가 곧 불룩해졌다. 연거푸 술잔을 기울여 기분이 좋아진 너구리들은 불룩해진 배를 북처럼 두드리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한데 이런 진수성찬을 얻어먹고 그냥 산으로 돌아가기도 미안하군. 우리가 잘하는 너구리춤이라도 한바탕 추어서 보답하기로 하세.”
늙은 너구리가 일어나 먼저 춤을 추니 다른 너구리들도 둥글게 늘어서서 즐겁게 춤을 추었다.
“덩더쿵 덩더쿵” 하고 늙은 너구리가 노래하면 다른 너구리들이 “똥또동 똥또동”하며 배를 북처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러자 덩더쿵 덩더쿵” “똥또동 똥또동”에 이러 “짜랑짜랑 빰빠밤”하는 묘한 소리도 가세했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뒤 늙은 너구리가 “그럼 이만 물러갈까. 이제 이 집안은 자손 대대로 번영하겠구나”라고 말하자 다른 너구리들이 소리를 모아 “잘 먹었습니다”라고 기특하게 절을 하고 저택을 떠났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노는데도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으니 필시 내가 혼자 꿈을 꾼 게로구나, 라고 생각한 머슴은 일단 물을 마셔서 정신을 차리려고 일어났다.
그때 발밑에 뭔가가 밟혔다. 하나를 집어 들고 희미한 사방등 불빛에 비춰보니 반짝반짝거리는 고반(1냥짜리 타원형 금화)이 아닌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고반과 고쓰부(고반의 4분의 1 가치를 지닌 금화)가 마루방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듬뿍 뿌려져 있었다. 게다가 꿈이 아닌 것이, 여기저기 매화꽃 같은 발자국이 보였다.
머슴이 두드려 깨워 잠에서 깨어난 일꾼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각자의 소매나 품에서도 고반과 고쓰부가 쏟아져 나와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하며 주인도 일어나 나왔다. 머슴이 여차저차해서 보시는 바와 같이 되었다고 하니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주인도 엄청난 보물더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꾼들은 모두 정직한 사람들이어서 소매나 품에 있는 고반 고쓰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내놓았다.
“아니네, 그건 하늘이 자네들에게 내려준 보물이니 각자 챙겨두게.”
이리하여 저택과 일꾼이 모두 유복해졌는데, 감탄스럽게도 천성이 부지런한 일꾼들은 그 행운을 한때의 복으로 여기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일터를 떠나는 자도 없고 재산을 탕진한 자도 없었다.
그러자 곧 목재 가격이 폭등하고 생사(生絲) 값이 뛰고 소와 말은 새끼를 풍풍 낳고 매년 풍년이 드는 등 저택은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재산이 쑥쑥 불어났다. - 389p. ~ 393p.
신이 깃든 산 이야기 / 아사다 지로, Jiro Asada /이규원 /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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