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땅이란 빌리는 것이다. 정착하든 떠나든 바람 따라 - 가라앉는 프랜시스

by oridosa 2026. 1. 4.
반응형

땅이란 빌리는 것이다. 정착하든 떠나든 바람 따라 - 가라앉는 프랜시스


칠십 대 후반에서 팔십 대 초반 노인들의,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인 부모들은 메이지 시대에 홋카이도 개척단의 일원으로 안치나이 마을에 왔다. 그들은 게이코와 똑같이 외지인이었다. 어떤 우연 때문에 전혀 인연이 없는 안치나이 마을로 흘러들어와 이곳을 개간하게 된 것이다. 원시림을 개간하면 이윽고 자기 땅이 될 거라고 순진하게 믿은 사람도 있었고, 아이누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을 테니까,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고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뭐라고 지칭할 수 없는 무엇인가로부터 토지를 빌리고 있다고 인식한 인간의 조신함과 당혹감, 송구함 같은 것이 그들 어딘가에는 있었다. 그것이 말끝에서 전달되어왔다. 필경 땅이란 빌리는 것이다. ‘정착하든 떠나든 바람 따라’라고 할 수 있는 ‘구애되지 않음’이라고나 할까. 그들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떠오르는 표정에는 외지인으로서의 무던함과 동시에 의지할 곳 없는 쓸쓸함이 떠도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살아보니 안치나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터뷰한 노인들처럼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외지인 취급한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삼대쯤 되면 거기가 태어난 고장이니까, 선주민 의식이 싹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주의나 주장이라기보다 감각의 문제였다. 게이코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18p. ~ 19p.


겨우 이백 년 정도 전, 안치나이 마을 일대는 원시림에 뒤덮여 있었다. 

이 땅이 애당초 누구의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숲은 울창했고, 무겁고, 조용하고 깊은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낙엽과 이끼로 푹신한 땅을 정처 없이 걸어가면 숲 저쪽에 빛과 소리의 기척이 새어나온다. 발이 향할 방향이 결정되면 걸음도 저절로 바빠지고 빨라진다. 가까워지는 물소리, 나무 너머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밝은 강기슭, 유베쓰가와이다. 천천히 지퍼를 내리는 것처럼 검푸른 숲이 강 위쪽만, 하늘을 향해 입을 가늘고 길게 벌리고 있다.

숲을 관통해서 흐르는 강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 건가. 그것은 생명체에게 무심하게 제시된 화살표나 같다. 산천어, 곤들매기, 홍송어에게는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치도록 허용하고, 여우나 홋카이도사슴, 큰곰에게는 마른 목을 축이도록 내어준다. 번식기가 오면 끊임없는 갈증과 풀 길 없이 솟구치는 것, 달아오르는 몸을 안쪽에서부터 식혀주면서 강은 망설임 없이 좀 더 북쪽의 오호츠크해를 향해서 흐른다. 오로지 흐르기만 하는 압도적인 물의 기세는 원시림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는 일 없이 앞길을 서두르는 물소리를 끊임없이 사방에 흩뜨린다. 

게이코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여기에서 농사를 시작하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원시림에 들어가 나무들을 베어서 운반하고, 조릿대풀 덩굴을 뿌리째 뽑고, 돌을 파내고, 땅을 경작한다. 이렇게 북쪽 끝에 위치한 거목이 솟아 있는 원시림을 왜 개간해야만 했던 것일까. 천 년 단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누군가가 걷고, 나무 열매를 줍고, 짐승을 사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사라지면 원상태로 회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람의 기억 따위 이미 잊어버린 원시림의 가지를 헤치고, 부엽토를 밟고, 쓰러진 나무를 넘으면서 다시 사람이 들어온다.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면 차갑고 딱딱한 땅에 태양 빛이 닿고, 개간된 땅은 푹신푹신 부드러워진다. 뿌린 씨는 처음에는 쭈뼛쭈뼛, 이윽고는 자유롭게 뿌리를 뻗고 물과 양분을 마음껏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벌채 작업은, 어느새 농한기의 겨울 마을을 지탱하는 제재업으로 발전해갔다. 남자 노인들의 자세나 체격이 입체적인 두께와 확실한 근력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거목을 다루던 부모 세대의 일상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게이코는 도쿄 남자들의 청결하고 얄팍한 가슴팍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안치나이 마을 노인들의 늙어서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있는 아름답고 단단한 상체나 굵은 목덜미에 자꾸 눈길이 갔다. 신기한 무언인가를 찾아냈을 때처럼 보통 때하고는 다른 맥박이 자신 안에서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 19p. ~ 21p.

가라앉는 프랜시스 / 마쓰이에 마사시, 松家 仁之 / 김춘미 / 비채

가라앉는 프랜시스 / 마쓰이에 마사시, 松家 仁之
가라앉는 프랜시스 / 마쓰이에 마사시, 松家 仁之

 

 

 

포카리스웨트, 340ml, 12개퍼플빈 전문가용 고급 색연필, 36색, 1개클레르퐁텐 스케치북, 210 x 297mm, 100매, A4, 100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