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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아침의 책들 - 인생은 예삿일이 아니야(‘시게짱의 승천’ 중)

by oridosa 2020. 1. 22.

[먼 아침의 책들 - 인생은 예삿일이 아니야(‘시게짱의 승천’ 중) ] 2020. 1. 21.

 

     시게짱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1년 내가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35년이나 지나서였다. 조후에 있는 카르멜회 수도원의 면회실에서다. 수녀들과 손님을 가로막은 널찍한 격자창 너머에 있는, 하얀 천으로 빈틈없이 감싸인 그녀의 볼은 열 탓인지 눈이 부실 만큼 복숭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코다테의 수도원에 있던 그녀가 몇 년 전부터 아교질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살던 이탈리아를 떠나 일본에서의 생활을 재정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내게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홋카이도까지 병문안을 갈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시게짱이 도쿄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조후의 수도원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곧장 만나러 갔던 것이다. - 11p.

     시게짱은 조후의 수도원에 한 달쯤 있다고 홋카이도로 돌아갔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상당히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푹 놓고 있었다. 세밑이 다가온 어느 날 아사코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이베가 오늘 아침 일찍 죽었어, 우리는 지금 홋카이도로 가려고. 아사코 언니가 그녀의 어렸을 때 애칭을 쓰며 이렇게 전했다. 그녀는 다음 날에 할 자잘한 일 준비도 다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몸이 안 좋아져 아침까지 버티지 못했다고 한다. 네가 가장 그 아이를 생각해준 것 같아서, 하며 아사코 언니는 목소리를 흐렸다.

     조후에서 만났을 때 대학 때의 이야기를 하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며 내가 어이없어하자 시게짱은 문득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정말이야, 인생은 예삿일이 아니야,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아주 으스대며 살았지.

     시게짱이 예삿일이 아닌 인생을 끝내고 승천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다. - 28p. ‘시게짱의 승천’ 중

먼 아침의 책들 / 스가 아쓰코 / 송태욱 / 한뼘책방

 

먼 아침의 책들 / 스가 아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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