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
동창회 자리에서는 흘러간 세월만큼 나이를 먹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야 한구석으로 사야카의 모습을 찾았다. 기대했던 대로 사야카도 있었다. 사귀던 시절에는 너무 말랐다 싶던 몸매도, 여성스러운 곡선이 돋보이게 변해 있었다. 화장 기술도 늘었는지 차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보이는, 앳된 소녀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는 예전 사귀던 시절 그대로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것이야말로 사야카의 본질이었고, 그 위태로움을 잃은 그녀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야카는 늘 무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리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길이 나에게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도 그녀를 보았다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알아채지 못한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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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 목소리가 무척 곤란한 듯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미세한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챈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야카는 손수건을 꺼내서 마치 표정을 감추려는 듯 이마 언저리를 짚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낯빛이 창백해 보였다. 계속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 시선을 알아챈 듯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날 처음으로 눈이 맞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결국 이날,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참석한 걸까.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며 자문했다. 동시에 다시는 사야카와 만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전화가 왔다. - 19p. ~ 21p.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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