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한 집안의 비극과 집의 기억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Keigo Higashino, 東野圭吾 / 최고은 / 비채]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탐정 소설작가로 국한하기에 그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다. 이 책은 추리에 기반을 두지만 서사의 힘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정통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겐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별다른 사건이나 다양한 등장인물 없이 독자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기 바란다.
남자 주인공(나)은 동창회에서 예전에 사귀었던 사야카를 만난다. 그리고 사야카로부터 일주일 후에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느 집 주소가 나왔는데, 자신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중요한 집인 것 같으니 그 집에 같이 가 달라는 것이다.
“어릴 적 기억 말이야. 어떤 집에 살았는지, 이웃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어.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가고 싶은 거야.” - 32p.
소설은 두 사람이 미지의 집을 찾아가서, 그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집에 얽힌 일을 밝혀내는 것이다.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린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닫혀있다. 어렵게 들어간 집은 오랜 시간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고,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두 사람은 집안의 가구, 책장의 책들 등 여러 가지 정황, 흔적들로 이 집에 얽힌 이야기를 유추해나간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서늘한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이 집에서도 특히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생명의 잔상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인 공간이랄까. 이렇게 있으니 불편해서 곧장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다. 그나저나 왜 드나들 때 굳이 지하를 통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 131p.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집에 살았던 어느 남자아이의 일기장이다. 일기장의 내용은 아이의 슬픈 성장사이고 한 집안의 비극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동학대를 유추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3대에 걸친 가족의 애증과 시기, 질투, 광기가 있다. 집은 집안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엔 사야카의 아버지와 관계된 집인 것 같았지만, 집에서 발견한 몇몇 단서들을 가지고 추리해 본 결과 (스포) 그 집은 사야카와 관계된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아빠는 내가 옛날 일을 떠올리는 걸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내가 이 집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여길 찾아오면, 옛날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게 아닐까.” - 202p.
일기의 주인인 아이, 아이의 가족, 사야카, 사야카의 아버지는 어떤 관계였고, 도대체 그 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사연을 하나씩 파고 들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다. 앞서 밝혀 낸 가족관계,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 아이의 심리에서 큰 반전이 있다. 집에 대해서는 더 큰 반전이 있다. 집은 시간을 담고, 사연을 담고 있다. 가족의 비극은 닫힌 문처럼 집 안에 갇혀 있다. 그 사실을 알아낸 순간, 또 다른 비극인지, 얽힌 운명의 풀림인지 모를 일이 생긴다.
11시 10분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66p)?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은 11시 10분이었다(75p). 시계가 전부 같은 시각에 멈춰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 집의 시간의 흐름이 일그러져 있는 듯한 느낌이야. 물론 의도적이겠지. 그 의도가 대체 뭘까? - 110p.
책을 읽다보면 아동학대 부분에서 마음이 아프다. 요즘에 아동학대를 대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옛날의 일을 서술한다. 가족과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작가는 한 집안의 비극을 ‘집’을 배경으로 전달한다. 집은 이 소설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와 사야카에게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표현은 사야카의 상황에 맞는 말이지만, 주인공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여준다. 집은 그 집에서 생활하고 성장하는 존재와 같다. 그래서 집에 머무는 사람은 집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고 운명을 이어간다. 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작가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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