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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탐심 - 좋은 라디오와 좋은 방송을 만든 애트워터 켄트

by oridosa 2022. 7. 14.

[라디오 탐심 - 좋은 라디오와 좋은 방송을 만든 애트워터 켄트]


애트워터 켄트는 제품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을 후원하며 라디오 보급에 힘썼다.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의 NBC와 CBS가 방송했던 ‘애트워터 켄트의 시간, The Atwater Kent Hour’은 수준 높은 콘서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라디오 방송은 라디오 제조사를 광고하는 효과는 물론이고, 라디오 구입 수요까지 늘렸다. 애트워터 켄트 라디오는 1929년 한 해에만 1만 2천 명의 노동자가 100만대의 라디오를 생산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미국 대공황은 애트워터 켄트 라디오에게 도전의 시간이었다. 1930년대부터 소비자들의 구매 능력이 떨어지면서 라디오 제조사들은 값싼 라디오로 방향을 바꿨다. 라디오 평균 판매 가격은 1929년 128달러에서 1931년에는 78달러로 낮아진다. 5구 진공관을 3구 진공관으로 바꾸며 라디오 가격을 낮춘 것이다. 애트워터 켄트를 이런 시류를 거부했다. 진공관 개수를 줄이면 수신력과 음질 등이 떨어져 수준 높은 음악 방송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품을 못 만들 바에는 명예롭게 퇴진하겠다는 생각으로 1936년 공장문을 닫았다. 

폐업 이후 애트워터 켄트의 행보도 이목을 끈다. 그는 미국 과학 산업을 이끈 기술 학교인 ‘프랭클린 연구소’를 매입했다. 이 건물은 18세기 신대륙 역사와 정신의 상징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름이 붙었다. 애트워터 켄트는 이 건물을 필라델피아시에 헌납했다. 현재는 필라델피아 역사박물관과 애트워터 켄트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애트워터 켄트는 15년의 짧은 라디오 생산 기간보다 필라델피아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라디오 역사에서 애트워터 켄트가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좋은 라디오 제품을 생산하면서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애트워터 켄트 라디오의 후원으로 8년 동안 지속된 라디오 방송은 수준 높은 공연 음악을 집 안에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한 미디어 혁명이었다. 좋은 방송은 청취자들이 라디오를 사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켄트 라디오뿐만 아니라 모든 라디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 120p. ~ 122p.

 

라디오 탐심 / 김형호 / 틈새책방

 

라디오 탐심 / 김형호 / 틈새책방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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