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고립된 산장, 마주친 말벌과의 사투, 나를 위험에 빠뜨린 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말벌과 추위, 살해 위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주인공.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말벌 ] 눈에 고립된 산장에서 마주친 말벌과의 사투
[말벌 / 기시 유스케, Yusuke Kishi / 이선희 / 창해 ]
1.
서스펜스 작가인 나(안자이 도모야)는 일부 작품이 인기를 얻어 작가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남편의 인기에는 못 미치지만, 아내 또한 그림책 작가다. 부부는 눈 덮인 산장에서 신작의 성공을 축하하는 이벤트를 마련한다. 전날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내는 자취를 감추었고, 신발, 옷, 휴대폰이 사라졌다. 컴퓨터, 팩스까지 모두 불통이다. 그리고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 바로 말벌의 날갯소리다. 예전에 말벌에 쏘인 적이 있는 나는 말벌에 취약하다. 이번에 또 쏘이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손잡이에 오른손을 대고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밑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떨림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경악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겁을 먹은 것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겨우 반격할 기회를 잡고 기세등등했다. 그런데 막상 말벌 대군을 향해 뛰어들 순간이 되자 공포가 밀려든 것이다. 단 한 번, 어디 한 군데라도 쏘이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날지 모른다. - 114p.
나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한다. 동료 작가와의 관계가 수상하다. 그들은 나를 없앨 생각이다. 그래서 산속에 나를 고립시키고, 말벌을 풀어놓았다.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나의 죽음은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다. 왜 나를 죽여야만 하고, 왜 말벌인가. 그들은 언제부터 이 일을 도모했던 것일까.
2.
작가 기시 유스케는 1997년 [검은 집](국내 2004년) 출간 이후 최고의 호러소설 작가로 부상한다. [말벌]은 2013년에 출간된 설산고립 스릴러다. 눈 덮인 산장, 모든 통신 수단 두절, 교통수단 무용지물. 게다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말벌의 공격까지. 그러나 말벌 이외에도 나를 공격할 적들은 또 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생명의 위협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주인공의 사투가 추위와 고립 속에서 더 긴박하게 다가온다. ‘최고의 호러작가’라는 타이틀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기시 유스케는 작품의 소재를 철저히 연구하기로 유명하다. 전문가급 지식을 작품에 녹여낸다. 이번 [말벌]에서도 말벌의 생태에 관한 전문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사실감을 극대화했다. 특히 1인칭 시점으로 말벌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듯, 숨 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몸에 와 닿는 한기, 심장박동과 통증, 말벌의 공포감이 압권이다.
미스터리 작품에서 1인칭 시점은 여러 가지 단점을 안고 있다. 미스터리 작품은 다양한 시점에서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여 추리를 입체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이 서사에 유리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1인칭 시점으로 긴장감을 극대화 시켰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며, 기시 유스케를 반전 장르문학의 거장으로 손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하실에 말고도 아직 살아남은 말벌이 있었던 모양이다. 말벌은 잡식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기본적으론 육식성이다. 어쩌면 내 피 냄새를 많았을지도 모른다. 젓 먹던 힘까지 짜내서 출구를 향해 기어갔다. 나무 바닥에 따뜻하고 끈적한 핏자국을 남기면서. 핼러윈의 호박처럼 생긴 오렌지색 얼굴. 치켜 올라간 커다란 두 눈. 미간에 있는 주술의 표식처럼 보이는 역삼각형 별 문양. 그 모습은 이윽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185p.
말벌의 습성에 관한 디테일을 보고 있으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3.
말벌의 공격을 받으며, ‘나’는 말벌의 치밀한 공격성에 놀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말벌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며 적을 공격하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말벌의 세계와 인간 사회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위에서 내리는 명령이 조직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다. 제 몫의 일을 다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제거당한다. 곤충들의 잔인한 본능과 조직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되는 현실, 양육강식의 사회구조를 비판한다.
여기는 인간 사회가 아니라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회성 곤충의 소굴이다. 구성원은 매일 부지런히 밖을 날아다니며 꿀벌처럼 꿀을 모아온다. 먹이를 얼마나 많이 갈취했느냐에 따라 구성원의 가치가 정해진다. 상대를 많이 죽여 고기를 많이 만든 녀석은 칭찬을 듣고 꿀을 받을 수 있다. 한편 더러운 방법에 적응하지 못해 망설인 사람은 처절하게 비난을 받은 끝에 목이 잘린 채 구경거리가 된다. - 135p.
인간의 욕망과 광기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욕망과 광기는 공포로 다가온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특히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광기의 표출은 사회적 공포가 된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광기에 의한 공포는 더욱 극대화된다. 소설은 공포를 차곡차곡 쌓으며 벼랑 끝으로 독자를 몰아간다.
주인공이 작가인만큼 이 책에는 작품 속의 작품들이 여러 편 나온다. 소설의 내용과 연관이 있거나 복선을 깔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두 번의 큰 반전이 나온다. [말벌]은 작가 기시 유스케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두루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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