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에 새겨진 무늬가 우리 존재의 당위성 - 솔스케이프
건축가에게는, 설계를 할 목적으로 땅을 처음 방문하는 것이 너무도 설레는 일이다. 특히, 모든 건축의 해답이 땅에 있다고 믿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주어진 땅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 땅에서 건축 설계의 실마리를 발견해야 하고, 그 실마리가 파편화되지 않도록 땅의 세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심각한 시간이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 가기 전 깨끗이 몸을 씻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실로 땅에는 엄청난 역사가 쓰여 있는 것을 나는 안다. 자연이 땅에 새긴 무늬 위에 우리의 삶의 무늬가 적층되면서 땅의 이야기는 더욱 깊어지고 고유해진다. 이게 바로 터무니라는 말이니, 터에 새겨진 무늬가 우리 존재의 당위성임을 우리 선조는 오래전부터 알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지문’이라는 단어로 변환하여 내 건축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쓴 지 이미 오래다.
땅을 점검하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건축은 땅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 땅의 운명을 바꾸느라 지맥을 끊고 물길을 돌리며 축대를 쌓아 올리는 건축, 따라서 터의 무늬가 없어진 터무니없는 건축, 즉 천편일률의 난개발 건축은 자연의 보복을 피할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땅은 다 다르니 그 해답도 다 다르다는 것이다. 좋은 건축이란 그 땅이 요구하는 대로 원래의 무늬를 밝혀내고 새로운 무늬를 조심스레 얹어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땅에 대해서 어찌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 199p.
솔스케이프 / 승효상 / 한밤의빛
Soul 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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