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근거를 마련하여 보여 주는 그런 글은 무척 단단하고 훌륭하리라. ]
어떤 글을 읽으며 가늠해 보라. 이 글에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의 켜가 쌓여 있는지. 어떤 글이든 시간과 노고가 들어가면 읽을 만한 가치도 깃든다. 온라인 강연 테드에 소개된 ‘한 번에 한 장의 사진으로 아빠와 딸의 유대감 만들기’는 다섯 살 난 딸과 미국 뉴욕 맨해튼에 갔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딸을 안고 있는 자기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스티븐 아디스의 이야기다. 그는 우연하게도 이듬해 같은 장소에 딸과 함께 가게 되었고 작년 생각이 나서 딸을 안고 사진을 또 찍었다. 그다음 해에는 일부러 그곳에 찾아가 똑같은 모습으로 사진을 남겼다. 딸에게 값진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딸은 아빠 품에 안긴 사진 15장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소재이지만 목적을 단순화하고 같은 일을 15년에 걸쳐 꾸준히 한 덕에 근사한 자료로 탈바꿈했다. 시간과 노력이 깃든 자료를 읽고 검토하자.
2008년 10월 26일,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에서 다룬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한다. 전주에서 시계 도매업을 하다가 1998년 구제 금융 시기에 파산해 수억 원대 빚을 지게 된 이종룡 씨는 막막한 생각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금세 마음을 고쳐먹고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빚을 줄여 가겠다 결심한다.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 자정쯤 목욕탕 청소 아르바이트를 끝낸 뒤 2시간 정도 쪽잠을 잔다. 일어나자마자 신문 배달을 하고 동트기 전 떡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날이 밝으면 학원 버스를 운전하는데, 이쪽 일터에서 저쪽 일터로 이동하면서 폐지와 고철을 수집한다. 떡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다가 저녁에는 군산까지 장거리 배달을 다녀온다. 쏟아지는 잠을 피하려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트럭 지붕 위에 올라가 고함을 지른다. 목욕탕에 도착하면 자정이 되는데 청소를 끝낸 뒤 죽은 듯 잠에 빠져들고 어김없이 두 시간 후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러 나간다.
이렇게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종룡 씨는 매달 4백만 원씩 빚을 갚았다. 1년 정도 지난 뒤 이 이야기가 채권단의 귀에 들어갔다. 무조건 갚을 테니 제발 믿어 달라 말하는 채무자만 만났던 은행 담당자들은 묵묵하고 성실하게 빚을 줄여 가는 이종룡 씨의 태도에 감동해 원금만 남긴 채 모든 이자를 탕감해 주었다. 이종룡 씨는 몇 년 뒤 어느 날 마지막 빚 1백만 원을 송금하고 나서 은행 문을 나오며 펑펑 울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러한 태도가 글쓰기나 번역에도 스며든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다짐하거나 뻗대지 않고 묵묵히 근거를 마련하여 보여 주는 그런 글은 무척 단단하고 훌륭하리라.
- 이강룡의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중 ‘근거가 충분한가’ 41p. ~ 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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